박원순캠프 좌편향 일색

北공작원 송두율 감싸 온 박원순 캠프인사들    송두율, 오길남 박사와 혜원·규원 入北 권유 金成昱   

1991년 5월 24일 북한 사회과학원 초청으로 방북한 송두율이 김일성을 만난 후 찍은 기념사진. 이 사진은 노동신문 1991년 5월 25일자 1면에 실렸다. 1. 11일 언론에 공개된 박원순 서울시장 후보의 캠프는 좌편향 일색이다. 이들 중엔 북한의 “對南공작원”으로 判示(판시)된 在獨학자 송두율 비호에 앞장서 온 이들도 많다.   박원순 서울시장 후보의 대변인 송호창 변호사는 2003년 9월22일 송두율 입국 당시 宋씨가 국보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자 변호인단에 들어갔다. 宋변호사는 송두율 석방을 촉구하는 소위 대책위원회 運營委員(운영위원)으로도 참여했다.   이 대책위원회는 2003년 11월28일 성명을 통해서 “재판과는 별도로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송두율 교수의 학문적 성과와 統一(통일)을 위한 진지한 노력은 정당한 평가를 받아야 한다”며 “검찰이 구시대적인 국가보안법의 형식논리만으로 宋교수를 구속기소하는 것은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이어 “宋교수에 대한 범죄혐의가 전혀 사실과 다르거나 처벌할 수 없는 것임을 입증하는 것은 물론이고(···)검찰과 국정원 관계자의 중대한 범죄행위인 피의사실 공표죄에 대해 고발하고, 포승 수갑 등 위법한 계구사용에 대해서도 법적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았었다.   2. 박원순 서울시장 후보의 특보인 조광희 변호사는 2004년 3월11일 ‘송두율 교수의 무죄 석방을 촉구하는 사회 원로·인사’라는 성명을 통해서 송두율의 석방을 촉구했다.   당시 성명은 “우리는 송두율 교수를 법정에 세우도록 한 국가보안법은 탈냉전 시대이자 남북 화해협력의 시대인 오늘의 시대정신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구시대 악법으로서 조속히 폐지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송두율 교수의 경우에는 설령 국가보안법에 따르더라도 무죄 석방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송두율 옹호는 박원순 변호사 본인도 예외가 아니다. 朴변호사는 2003년 8월7일 ‘해외민주인사 명예회복과 귀국보장을 위한 범국민추진위원회’(이하 범국민추진위)에 강정구 前동국대 교수, 오종렬․한상렬 한국진보연대 상임고문 등과 함께 공동대표로 참여했다. 당시 범국민추진위는 송두율을 비롯해 곽동의·이수자(작곡가 윤이상의 부인) 등 해외 親北인사를 ‘해외 민주인사’로 부르며 이들의 귀국을 추진했었다.   3. 송두율은 2003년 9월22일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주관하는 해외인사 초청행사 일환으로 37년 만에 한국에 왔지만, 독일에서의 反국가 활동을 이유로 검찰에 구속됐었다. 宋씨는 북한 조선로동당 서열 23위의 ‘정치국 후보위원’이라는 고위직 공작원 여부가 논란이 됐었다.   宋씨는 2004년 3월 1심에서 국가보안법상 반국가단체 가입, 특수탈출 및 회합통신 위반 등 혐의로 징역 7년의 중형을 선고받았다. 2004년 7월 항소심은 宋씨가 북한 ‘정치국 후보위원’임을 증명하기 어렵다며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해 풀어줬지만 宋씨가 “북한의 조선로동당에 入黨(입당)해 對南공작을 했고, 북한의 체제유지를 위한 목적수행을 해왔다”는 사실을 확인한 바 있다.    4. 송두율은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통영의 딸들-신숙자·오혜원·오규원 사건> 관련, 오길남 박사의 入北(입북)을 권유한 인물로도 알려졌다.    오길남 박사의 증언에 따르면, 85년 8월 당시 송두율은 70년대 초 독일 유학시절부터 가깝게 지내온 吳박사가 경제난과 아내의 병으로 어렵게 생활하자 “기댈 곳은 북한밖에 없다”며 오길남 가족의 入北을 권유했다. 吳박사는 그의 저서 ‘김일성 주석 내 아내와 딸을 돌려주오’ 및 최근 다시 출판된 ‘잃어버린 딸들 오! 혜원 규원’이라는 책을 통해 이렇게 적었다.  “송두율의 入北(입북) 권유 이후 재독작곡가 윤이상은 이제 민족통일운동에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때라고 생각하오. 그러니 북한으로 가서 그동안 배운 지식을 동포를 위해 썼으면 하오’라는 편지를 써 보냈고, 거듭 ‘고생하지 말고 북한으로 가시오. 거기 가면 오박사는 대접을 받으면서 학문을 이룰 수가 있소’고 권했다”     吳박사는 1985년 12월 송두율을 비롯한 윤이상, 김종한 등에 의해 북한공작원을 소개받아 아내와 두 딸을 데리고 평양에 들어갔고 이후 1986년 11월 평양의 칠보산연락소에서 ‘한민전’ 對南흑색선전요원으로 활동하게 된다.    5. 오길남 박사는 북한에 와서 처참한 현실은 물론 송두율의 실체도 확인할 수 있었다. 吳박사는 평양 칠보산연락소 이창균 고문 등 對南사업본부 고위 인사들로부터 “송두율이 70년대 초반부터 1년에 북한을 1~2차례씩 왕래해 온 북한의 비밀노동당원이었음을 확인했다”며 “북한방문은 평소 유럽 외딴 곳으로 휴가를 간다는 외양을 취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吳박사는 “86년 2월 평양 용성구역 남조선혁명박물관에 갔을 때 1975년 송두율이 프랑크푸르트에서 직접 만들었던 ‘유신독재 타도하여 민주사회 건설하자’는 프래카드가 유리관에 전시돼 있는 것을 보기도 했다”고 말했다.    吳박사는 앞서 언급한 책에서 北에서 확인한 송두율의 실체를 이렇게 적고 있다.    “자신을 철저하게 은닉해 온 송두율에게 깊은 증오를 느꼈다. 그러나 나는 이미 평양에 있었다. 나는 그가 가증스러운 인간이라고 생각했다…반정부활동을 한다고 모두 북과 가까운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독재정권이 반정부인사를 탄압하는 구실이었다. 그렇게 믿고 있던 내게 송두율은 충격이었다”